♧ 김용화 시 모음/•김용화 시모음 2

•김용화 시 모음 2

김용화 (poetkyh) 2021. 4. 9. 11:04

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뒷걸음 이별

 

 

우리 둘은 이별을 마주 보며 뒤로 걸었다

이별이

이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

너는 나

한 개 점으로 지워질 때까지

 

 

벙어리부엉새

 

 

만약에 만약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짝 잃은 거위처럼

울어 줄 사람 있다면

 

목울음 톺아내며 저녁 하늘 떠돌아다니는 외기러기처럼

울어 줄 사람 있다면

 

달빛이 천강千江을 비추는 이 밤

눈물 없이 울고 있는 저 벙어리부엉새처럼

울어 줄 사람 있다면

 

감빛 노을 타는 가을날을 잡아 나도 한세상 떠나 보련마는

 

 

아름다운 일요일

 

 

일요일이면 아내는 교회로 가고 난

늦잠을 잔다

잠을 깨도 그냥 누워서 생각을 한다

하늘나라에서 천사 옷 걸친 아내는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지금쯤 믿음 없는 남편 위해

성경책 위에 얼굴을 묻고 있을 시간,

싸늘하게 식은 찬밥 앞에서

난 또 한 덩이 찬밥이 된다

아름다운 일요일, 그래 난 참 행복해-

 
 

겨울밤

 

 

오늘처럼 숫눈발 푹푹 쏟아붓는 밤이었을 것이다

사립 밖엔
하얀 눈 함뿍 쓰고 가을떡 돌리는 소녀가 있었다

더운 김 모락모락 오르는 방금 쪄낸
붉은 수수떡,

나풀거리는 석유등 불빛에
살짜기 드러난 그녀의 뺨도 한껏 상기되는 밤이었다

 

그 밤

 

 

젖가슴 봉긋 드러나 보이던

열다섯 그녀는

 

풀 목걸이 걸고 배시시 웃을 때

볼우물

깊게 파이고는 했다

 

그 드맑은 우물 속에 퐁당,

청개구리 한 마리

뛰어들고 싶던 밤이 있었다

 

초아흐레 연한 달빛이

삼박삼박

갈잎에 베어져 드러눕던 밤이었다

 
 

마중

 

 

비가 오는 날마다

할머니는

삼거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세시차가 있고

다음은

다섯 시 반이었다

 

헌 우산은 쓰고

새 우산은 접고

세시차에 안 오면 다음 차가 올 때까지

 

비에 젖어,

해오라기처럼 서 계시었다

 

 

곡우 단비

 

 

하늘이 때를 알아 비를 내리십니다

달팽이는 긴 뿔대를 세우고

가재는 바위를 굴리며

청개구리는 연잎 위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물새는 수면을 차고 날며

잉어는 못 위로 뛰어올라

농부는 땅에 엎드려

온몸으로 오시는 비님을 마중합니다

 

 

비 오다가 갠 날

 

 

젊은 엄마가 옥양목 앞치마

반듯하게 매고

부엌에서 손님 맞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

 

젊은 아버지가 원추리꽃 꺾어

소 귓등에 꽂아주고

무지개 뜬 산길 넘어

소 앞세우고 돌아올 것 같은,

 

 

5월의 아침

 

 

간밤에 비 내리고 도랑 물소리

또랑또랑 들려온다

연초록 잎새마다 고운 햇살이 빛난다

새들이 제 목소리로 노래 부르고

맑게 씻긴 잎잎 사이로

해그림자도 몇 장 떨어져 있다

세상은 아무 일 없고

유월이 오면 녹음은 더 짙어질 것이다

아이들도 키가 더 자라 있을 것이다

 

감꽃 지는 마을

 

 

감꽃 피는 내 고향 가고 싶다

논두렁에 콩 심고

비 맞으며 깨 모종하고

 

장날이면 엄마랑 단둘이

등불 밝혀 들고

한내 장길 아버지 마중을 나가고 싶다

개구리 울음소리

가만가만 밟아가며

 

오늘같이 비 오다가 갠 날엔

앞산 뒷산

나란히 잠든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깨워 일으키고 싶다

 

 

고향 산 베고 누워

 


저물녘에 들려오는 오뉴월 무논의 개구리 울음소리

건너말 외딴집 불빛 새로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

한여름 밤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

저녁나절 들려오는 먼 마을 닭 울음소리

보름도 갓 지난 초가을 빈 마을 우물 터서 들려오는

가늘고 긴 풀벌레 소리 베고 누워 고요히 저물고 싶다

 

 

세월 속에서

 

 

눈이 와서 마을이 박속처럼 화안한 날

고향에 돌아와서 밥을 먹는다

80을 바라보는 엄마가 해준 흰 쌀밥 먹는다

90을 코앞에 둔 아버지가

50이 넘은 아들 밥 먹는 모습 지켜보다

귀밑에 흰 머리 하나를 뽑아 준다

눈꽃이 전설처럼 피어나는 동화 속 마을에서

 

 

장마 끝나고

 

 

장마 끝나고,

갈울내깔

징검다리 하나둘 모습 드러내면

시냇물 맑아져 송사리 피라미 떼 줄을 짓는다

아랫내 물턱

큰물에 휩쓸려온 방개고무신 한 짝 걸려 있다

하늘이 높고 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버들붕어 한 꿰미씩 들고 곱돌모랭이 돌아오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청개구리의 노래

 

 

터벅터벅 바짓가랑이 적시며 울 어매 마른 젖 파러 갈꺼나

구시렁구시렁

밤비는 저냥 내려 쌓는데

하늘 간 울 할매 명 치마 땟국 냄새나 맡으러 갈꺼나

구죽죽 구죽죽이

퍼붓는 밤비야

 

 

아내

 

 

눈길만 마주치고 살자며

첫날밤

잠도 안 자고

창밖에 별만 쳐다보던 그 여자

 

아들 군대 보내 놓고

오늘은

밥도 안 하며

먼 산만 바라보는 저 여자

 

 

가족사진

 

 

계급장도 없는 훈병 모자 눌러쓴

삼십 중반 아버지가

세 살짜리 고추를 안고

박꽃처럼 환하다

 

할머니랑 엄마랑

광시, 청양, 부여 백마강을 배 타고 건너 꼬박

이틀 만에 당도한 논산훈련소

 

스물다섯 분꽃 같은 엄마는

내외를 하는지

다소곳이 고갤 숙인 채

새촘한 표정,

무슨 생각 저리도 골똘한 것일까

 

사진 밖에 서 있는

할머니 환한 얼굴도, 내 눈에는 환하다

 

 

가장의 밤

 

 

잠든 아내 이불 끌어다

미운 발

덮어주는 일

 

딸 자는 방 살짝 들어가

지폐 한 장

찔러주는 일

 

아들놈 우산 갖다주고

책가방

들어주는 일

 

창밖 밤비 소리 들으며

쓴술

삼키는 일

 

 

소꿉놀이

 

 

한세상, 흙에서 나

땅 파고

씨를 묻다

 

저 가을 강변

감빛 물 곱게 드는 저녁노을 속으로

소리소문없이

잠겨 버렸으면

 

소꿉놀이하다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듯

 

 

첫사랑 그 여자

 

 

남몰래

가슴 깊이 묻고 살아도

꿈속에서 불쑥 뛰쳐나와 들킬 것 같아

불안하다

 

한세상 살며

가슴 좀 실컷 아파 보라고

꿈길마다 찾아와

눈웃음치다

 

한 발짝

다가가면

살래살래 달아나 버리는

 

 

그 밤

 

 

젖가슴 봉긋 드러나 보이던

열다섯 그녀는

 

풀 목걸이 걸고 배시시 웃을 때

볼우물

깊게 파이고는 했다

 

그 드맑은 우물 속에 퐁당,

청개구리 한 마리

뛰어들고 싶던 밤이 있었다

 

초아흐레 연한 달빛이

삼박삼박

갈잎에 베어져 드러눕던 밤이었다

 

강 건너 그대

 

 

하늘빛이 흐려서 손 한번 헐겁게

잡아 보지 못했네

그리워 말 못 하고 살아온 지

오랜 지금

강 건너 갈밭머리

반백의 머리칼 날리며 쓸쓸히 웃고 섰는 여인아,

그대 향한 그리움 오늘도

겨울 강둑에

빈 해바라깃대처럼 서 있을 뿐이네

 

 

내 안의 여자

 

 

우체국 측백나무 사이로

바라보던

오렌지색 원피스가

고옵던 그녀

 

까마득한 세월 흘러갔어도

그 집 앞 지날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지

 

그날 읍내로만 따라 나왔더라면

지금 그녀는

곁에 있을 텐데

항상, 내 안에 있지

 

 

봄밤

 

 

보리술 씬냉이국에

그대 목소리 동동 띄워 맑은 귀로

담아내는

 

청복의

 

 

소래산 진달래꽃

 

 

언제 보아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산

 

밀물 드는

포구에서

짜디짠 소금바람 불어오면

소래산 진달래는 석양에 붉게 핀다

 

앙상한 가지마다

고만고만한 작은 슬픔들 거느리고

해마다

붉게 피는

 

소래산 진달래꽃

 

 

소래산

 

 

원미산 기슭 성가양로원 옥상에서

봄 햇살 눈썹차양하고 보면

죽은 예수의 몸 떠받치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고

 

관곡지 연밭에서 소낙비를 긋고

활짝 핀 연꽃 위로 보면

앞가슴 풀은 채 아기 붓다를 끌어안은

마야 왕비의 모습이고

 

마니산 참성단 오르다 숨 고르며 잠깐

먼눈 뜨고 보면

박달나무 아래 만삭이 된 웅녀가

우러러 하늘에 손을 모은 모습이고

 

송도 앞 겨울 바다가 진홍빛으로 탈 때

느릿한 갈매기 나래짓 사이로 보면

장엄한 어둠의 품속으로

아름다운 한 영혼이 안겨드는 모습이고

 

 

먼 손님

 

 

오래도록 기다린 당신, 

머리카락 끊어

꽁보리밥 한 덩이

마련했습니다

찬물에 잘 말아서

새로 담근 열무김치 알맞게 익었으니

얹어 드시고

가시는 먼먼 길

부디, 살펴 가십시오

 

 

망종 지나고

 

 

게으른 잠에서

막 깨어나는

 

청개구리

한 마리

 

얼마나 울었는지

지난밤

 

눈두덩이

부어 있다

 

 

쏙독새 울음 소리

 

 

큰아들 몰래 고향 집 팔았단 소식 듣고

사흘 밤낮 이불 쓰고 누워 있었네

꿈속에도 바람결에 묻어가

대문 밖 서성이며

달 그늘에 잠긴 뜨란 넘겨 보다

낯선 개가 캉캉 짖어 뒷걸음쳐 돌아오고 말았네

밤마다 잠 못 들고 떠도는

발걸음아

오늘 밤은 또 어느 마을 떠돌다

밤이슬에 젖어 돌아올까나

질라래비 훨훨~

하루에도 몇 번씩 날개 돋친 새가 되어 날아가

엎드려 입 맞추고 돌아오는 땅,

인제는 새봄이 찾아와도

돌아오지 않는 식구 하나 더 늘어

샘봉에 쏙독새야, 밤을 새워 울어 쌓겠네

 

 

할미꽃

 

 

돌아가시기

전날 밤

 

밤새

큰손자 이름 부르셨단다

 

할머니-

 

 

눈 내리는 저녁

 

 

저녁 눈 설핏하게 떠도는 날은

고향마을 찾아들고 싶다

아이들 한바탕 떠들다 돌아가고

시누대 밭 참새들만 춥다고 조잘대던

저녁 어스름,

그 집 앞 지나다가

나풀대던 단발머리 보고 싶다

외양간에 늙은 소

숨 몰아쉬는 소리 들릴 듯하다

 

 

꼬마 시인

 

 

엄마- 달님이가 자꾸 나를 쳐다봐

괜찮아, 우리 애기 예뻐서 그래

 

엄마- 달님이가 나를 따라와

괜찮아, 우리 애기 함께 놀자고 그래

 

엄마, 엄마- 달님이 물에 빠지려 해

울지 마, 달님이는 옷이 젖지 않아

 

세 살짜리 꼬마가

엄마 등에 업혀 소래포구를 건너간다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공기

문밖에서 비 맞고 있다

 

젊어서 혼자되어

비를 맞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를 맞는다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

 

 

명희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을 수는 없을까

캄캄한 어둠만 밀려오던

종점 근처

홍합 국물 따듯하게 뎁혀지던 포장마차

 

오늘같이 눈 내리는 밤이 오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산토끼처럼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을 눈매 곱던 널 찾아내어

 

빠알간 숯불에 알맞게 잘 구워진

꼼장어 소라 안주 삼아

독한 소주 한잔 빈속에 털어 넣고 널과 함께

밤의 끝까지 걸어가다 걸어가다

 

눈 속에 포-옥 파묻혀 영영 잠들고 싶어

그때, 우린 참 많이 젊어 있었지

강냉이 빵이 먹고프다던 너, 이 밤 어디에 박혀 있니

 
 

아무도 모르리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리

70년대가 막 저물어가던 무교동이나 청진동 낚지골목 어디쯤

통금 사이렌 고막을 찢고 탐조등 불빛 긴 혓바닥 날름거리며

도심 한복판을 샅샅이 핥아내던 후미진 골목

페인트칠 희미한 긴 등받이 의자 비스듬히 기대앉아

우리 둘은 온몸이 달아 입술과 입술이 젖은 풀잎처럼 포개져

밤을 밝히고 있었다는 이 엄연한 사실만큼은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리

다만, 밤을 새워 반짝이며 어깨를 토닥여 주던 저 별들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