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뒷걸음 이별
우리 둘은 이별을 마주 보며 뒤로 걸었다
이별이
이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
너는 나
한 개 점으로 지워질 때까지
벙어리부엉새
만약에 만약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짝 잃은 거위처럼
울어 줄 사람 있다면
목울음 톺아내며 저녁 하늘 떠돌아다니는 외기러기처럼
울어 줄 사람 있다면
달빛이 천강千江을 비추는 이 밤
눈물 없이 울고 있는 저 벙어리부엉새처럼
울어 줄 사람 있다면
감빛 노을 타는 가을날을 잡아 나도 한세상 떠나 보련마는
아름다운 일요일
일요일이면 아내는 교회로 가고 난
늦잠을 잔다
잠을 깨도 그냥 누워서 생각을 한다
하늘나라에서 천사 옷 걸친 아내는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지금쯤 믿음 없는 남편 위해
성경책 위에 얼굴을 묻고 있을 시간,
싸늘하게 식은 찬밥 앞에서
난 또 한 덩이 찬밥이 된다
아름다운 일요일, 그래 난 참 행복해-
겨울밤
오늘처럼 숫눈발 푹푹 쏟아붓는 밤이었을 것이다
사립 밖엔
하얀 눈 함뿍 쓰고 가을떡 돌리는 소녀가 있었다
더운 김 모락모락 오르는 방금 쪄낸
붉은 수수떡,
나풀거리는 석유등 불빛에
살짜기 드러난 그녀의 뺨도 한껏 상기되는 밤이었다
그 밤
젖가슴 봉긋 드러나 보이던
열다섯 그녀는
풀 목걸이 걸고 배시시 웃을 때
볼우물
깊게 파이고는 했다
그 드맑은 우물 속에 퐁당,
청개구리 한 마리
뛰어들고 싶던 밤이 있었다
초아흐레 연한 달빛이
삼박삼박
갈잎에 베어져 드러눕던 밤이었다
마중
비가 오는 날마다
할머니는
삼거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세시차가 있고
다음은
다섯 시 반이었다
헌 우산은 쓰고
새 우산은 접고
세시차에 안 오면 다음 차가 올 때까지
비에 젖어,
해오라기처럼 서 계시었다
곡우 단비
하늘이 때를 알아 비를 내리십니다
달팽이는 긴 뿔대를 세우고
가재는 바위를 굴리며
청개구리는 연잎 위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물새는 수면을 차고 날며
잉어는 못 위로 뛰어올라
농부는 땅에 엎드려
온몸으로 오시는 비님을 마중합니다
비 오다가 갠 날
젊은 엄마가 옥양목 앞치마
반듯하게 매고
부엌에서 손님 맞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
젊은 아버지가 원추리꽃 꺾어
소 귓등에 꽂아주고
무지개 뜬 산길 넘어
소 앞세우고 돌아올 것 같은,
5월의 아침
간밤에 비 내리고 도랑 물소리
또랑또랑 들려온다
연초록 잎새마다 고운 햇살이 빛난다
새들이 제 목소리로 노래 부르고
맑게 씻긴 잎잎 사이로
해그림자도 몇 장 떨어져 있다
세상은 아무 일 없고
유월이 오면 녹음은 더 짙어질 것이다
아이들도 키가 더 자라 있을 것이다
감꽃 지는 마을
감꽃 피는 내 고향 가고 싶다
논두렁에 콩 심고
비 맞으며 깨 모종하고
장날이면 엄마랑 단둘이
등불 밝혀 들고
한내 장길 아버지 마중을 나가고 싶다
개구리 울음소리
가만가만 밟아가며
오늘같이 비 오다가 갠 날엔
앞산 뒷산
나란히 잠든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깨워 일으키고 싶다
고향 산 베고 누워
저물녘에 들려오는 오뉴월 무논의 개구리 울음소리
건너말 외딴집 불빛 새로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
한여름 밤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
저녁나절 들려오는 먼 마을 닭 울음소리
보름도 갓 지난 초가을 빈 마을 우물 터서 들려오는
가늘고 긴 풀벌레 소리 베고 누워 고요히 저물고 싶다
세월 속에서
눈이 와서 마을이 박속처럼 화안한 날
고향에 돌아와서 밥을 먹는다
80을 바라보는 엄마가 해준 흰 쌀밥 먹는다
90을 코앞에 둔 아버지가
50이 넘은 아들 밥 먹는 모습 지켜보다
귀밑에 흰 머리 하나를 뽑아 준다
눈꽃이 전설처럼 피어나는 동화 속 마을에서
장마 끝나고
장마 끝나고,
갈울내깔
징검다리 하나둘 모습 드러내면
시냇물 맑아져 송사리 피라미 떼 줄을 짓는다
아랫내 물턱
큰물에 휩쓸려온 방개고무신 한 짝 걸려 있다
하늘이 높고 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버들붕어 한 꿰미씩 들고 곱돌모랭이 돌아오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청개구리의 노래
터벅터벅 바짓가랑이 적시며 울 어매 마른 젖 파러 갈꺼나
구시렁구시렁
밤비는 저냥 내려 쌓는데
하늘 간 울 할매 명 치마 땟국 냄새나 맡으러 갈꺼나
구죽죽 구죽죽이
퍼붓는 밤비야
아내
눈길만 마주치고 살자며
첫날밤
잠도 안 자고
창밖에 별만 쳐다보던 그 여자
아들 군대 보내 놓고
오늘은
밥도 안 하며
먼 산만 바라보는 저 여자
가족사진
계급장도 없는 훈병 모자 눌러쓴
삼십 중반 아버지가
세 살짜리 고추를 안고
박꽃처럼 환하다
할머니랑 엄마랑
광시, 청양, 부여 백마강을 배 타고 건너 꼬박
이틀 만에 당도한 논산훈련소
스물다섯 분꽃 같은 엄마는
내외를 하는지
다소곳이 고갤 숙인 채
새촘한 표정,
무슨 생각 저리도 골똘한 것일까
사진 밖에 서 있는
할머니 환한 얼굴도, 내 눈에는 환하다
가장의 밤
잠든 아내 이불 끌어다
미운 발
덮어주는 일
딸 자는 방 살짝 들어가
지폐 한 장
찔러주는 일
아들놈 우산 갖다주고
책가방
들어주는 일
창밖 밤비 소리 들으며
쓴술
삼키는 일
소꿉놀이
한세상, 흙에서 나
땅 파고
씨를 묻다
저 가을 강변
감빛 물 곱게 드는 저녁노을 속으로
소리소문없이
잠겨 버렸으면
소꿉놀이하다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듯
첫사랑 그 여자
남몰래
가슴 깊이 묻고 살아도
꿈속에서 불쑥 뛰쳐나와 들킬 것 같아
불안하다
한세상 살며
가슴 좀 실컷 아파 보라고
꿈길마다 찾아와
눈웃음치다
한 발짝
다가가면
살래살래 달아나 버리는
그 밤
젖가슴 봉긋 드러나 보이던
열다섯 그녀는
풀 목걸이 걸고 배시시 웃을 때
볼우물
깊게 파이고는 했다
그 드맑은 우물 속에 퐁당,
청개구리 한 마리
뛰어들고 싶던 밤이 있었다
초아흐레 연한 달빛이
삼박삼박
갈잎에 베어져 드러눕던 밤이었다
강 건너 그대
하늘빛이 흐려서 손 한번 헐겁게
잡아 보지 못했네
그리워 말 못 하고 살아온 지
오랜 지금
강 건너 갈밭머리
반백의 머리칼 날리며 쓸쓸히 웃고 섰는 여인아,
그대 향한 그리움 오늘도
겨울 강둑에
빈 해바라깃대처럼 서 있을 뿐이네
내 안의 여자
우체국 측백나무 사이로
바라보던
오렌지색 원피스가
고옵던 그녀
까마득한 세월 흘러갔어도
그 집 앞 지날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지
그날 읍내로만 따라 나왔더라면
지금 그녀는
곁에 있을 텐데
항상, 내 안에 있지
봄밤
보리술 씬냉이국에
그대 목소리 동동 띄워 맑은 귀로
담아내는
청복의
밤
소래산 진달래꽃
언제 보아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산
밀물 드는
포구에서
짜디짠 소금바람 불어오면
소래산 진달래는 석양에 붉게 핀다
앙상한 가지마다
고만고만한 작은 슬픔들 거느리고
해마다
붉게 피는
소래산 진달래꽃
소래산
원미산 기슭 성가양로원 옥상에서
봄 햇살 눈썹차양하고 보면
죽은 예수의 몸 떠받치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고
관곡지 연밭에서 소낙비를 긋고
활짝 핀 연꽃 위로 보면
앞가슴 풀은 채 아기 붓다를 끌어안은
마야 왕비의 모습이고
마니산 참성단 오르다 숨 고르며 잠깐
먼눈 뜨고 보면
박달나무 아래 만삭이 된 웅녀가
우러러 하늘에 손을 모은 모습이고
송도 앞 겨울 바다가 진홍빛으로 탈 때
느릿한 갈매기 나래짓 사이로 보면
장엄한 어둠의 품속으로
아름다운 한 영혼이 안겨드는 모습이고
먼 손님
오래도록 기다린 당신,
머리카락 끊어
꽁보리밥 한 덩이
마련했습니다
찬물에 잘 말아서
새로 담근 열무김치 알맞게 익었으니
얹어 드시고
가시는 먼먼 길
부디, 살펴 가십시오
망종 지나고
게으른 잠에서
막 깨어나는
청개구리
한 마리
얼마나 울었는지
지난밤
눈두덩이
부어 있다
쏙독새 울음 소리
큰아들 몰래 고향 집 팔았단 소식 듣고
사흘 밤낮 이불 쓰고 누워 있었네
꿈속에도 바람결에 묻어가
대문 밖 서성이며
달 그늘에 잠긴 뜨란 넘겨 보다
낯선 개가 캉캉 짖어 뒷걸음쳐 돌아오고 말았네
밤마다 잠 못 들고 떠도는
발걸음아
오늘 밤은 또 어느 마을 떠돌다
밤이슬에 젖어 돌아올까나
질라래비 훨훨~
하루에도 몇 번씩 날개 돋친 새가 되어 날아가
엎드려 입 맞추고 돌아오는 땅,
인제는 새봄이 찾아와도
돌아오지 않는 식구 하나 더 늘어
샘봉에 쏙독새야, 밤을 새워 울어 쌓겠네
할미꽃
돌아가시기
전날 밤
밤새
큰손자 이름 부르셨단다
할머니-
눈 내리는 저녁
저녁 눈 설핏하게 떠도는 날은
고향마을 찾아들고 싶다
아이들 한바탕 떠들다 돌아가고
시누대 밭 참새들만 춥다고 조잘대던
저녁 어스름,
그 집 앞 지나다가
나풀대던 단발머리 보고 싶다
외양간에 늙은 소
숨 몰아쉬는 소리 들릴 듯하다
꼬마 시인
엄마- 달님이가 자꾸 나를 쳐다봐
괜찮아, 우리 애기 예뻐서 그래
엄마- 달님이가 나를 따라와
괜찮아, 우리 애기 함께 놀자고 그래
엄마, 엄마- 달님이 물에 빠지려 해
울지 마, 달님이는 옷이 젖지 않아
세 살짜리 꼬마가
엄마 등에 업혀 소래포구를 건너간다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공기
문밖에서 비 맞고 있다
젊어서 혼자되어
비를 맞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를 맞는다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
명희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을 수는 없을까
캄캄한 어둠만 밀려오던
종점 근처
홍합 국물 따듯하게 뎁혀지던 포장마차
오늘같이 눈 내리는 밤이 오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산토끼처럼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을 눈매 곱던 널 찾아내어
빠알간 숯불에 알맞게 잘 구워진
꼼장어 소라 안주 삼아
독한 소주 한잔 빈속에 털어 넣고 널과 함께
밤의 끝까지 걸어가다 걸어가다
눈 속에 포-옥 파묻혀 영영 잠들고 싶어
그때, 우린 참 많이 젊어 있었지
강냉이 빵이 먹고프다던 너, 이 밤 어디에 박혀 있니
아무도 모르리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리
70년대가 막 저물어가던 무교동이나 청진동 낚지골목 어디쯤
통금 사이렌 고막을 찢고 탐조등 불빛 긴 혓바닥 날름거리며
도심 한복판을 샅샅이 핥아내던 후미진 골목
페인트칠 희미한 긴 등받이 의자 비스듬히 기대앉아
우리 둘은 온몸이 달아 입술과 입술이 젖은 풀잎처럼 포개져
밤을 밝히고 있었다는 이 엄연한 사실만큼은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리
다만, 밤을 새워 반짝이며 어깨를 토닥여 주던 저 별들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