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초청 특강 자료
# 코엑스, 별마당도서관
# 일정: 2024.2/23(금). pm 7시
# 강연 키워드: 김용화 시인의 작품세계
'나의 삶과 시'
*동영상을 네이버 ‘별마당 명사특강 김용화 시인 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소한 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 만날 날을 기다리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짐 자전거
한평생 버겁던 짐 다 내려놓고
타이어도 튜브도
안장도 짐받이도 떨어져 나간 채
고향 집 앵매기 집 짓는 헛간
구석에 처박혀
예산장- 홍성장- 삽다리장-
새벽안개 가르며 씽씽
내달리던
푸른 시절, 푸른 날들 추억하다가
장꽝에
감꽃 구르는 소리…
가슴 허무는
아버지의 짐 자전거
3.국어시간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
시를 사랑한다는 여학생들과
하나가 되는 국어시간
선생님 시해요 교과서는 따분해요
시는 화장실이나 혹은
요강 위에 앉아서나 해야 되는 거란다
까르르-
선생님은 너무 관능적이셔요
그래 인생이란 어차피
관능적이고 관능적이고 관능적인 거란다 관능이 뭔지
알기나 하니 조그만 것들이
안 조그매요 선생님 컸어요 다 컸어요
얘도요 얘도요 얘도요
크긴 뭐가 다 컸단 말이냐 얘들이, 관능도
미적 승화만 된다면
훌륭한 예술이 되느니라 일테면
관능미란 것이 있고……
노트에 적어!
4.아름다운 일요일
일요일이면 아내는 교회로 가고 난
늦잠을 잔다
잠을 깨도 그냥 누워서 생각을 한다
하늘나라에서 천사 옷 걸친 아내는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지금쯤 믿음 없는 남편 위해
성경책 위에 얼굴을 묻고 있을 시간,
싸늘하게 식은 찬밥 앞에서
난 또 한 덩이 찬밥이 된다
아름다운 일요일, 그래 난 참 행복해-
5. 딸에게
너는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에게 날아온 천상의
선녀가
하룻밤 잠자리에 떨어뜨리고 간 한 떨기의 꽃
6. 딸 시집보내고
신발장에 벗어놓은 네 조그만 구두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베란다에 적막하게 걸려 있던 이쁜
네 팬티들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하얀 눈 내린다
먼지처럼
허공을 떠돌다
조금씩 내려서 쌓인다
늙은 아내, 빈 둥지를
지키고 앉아
시집간 딸 걱정할 만큼만 눈이 내린다
7. 그 겨울
겨우내 하얀 눈이 쌓이는
고향 집 삼밭
캄캄한 구덩이 속에서는
샛노란 무 싹들이 세상 소식 궁금하다고
기지개를 켜며
새록새록
고개를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8. 산길에서
나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깊은 산 외딴 길섶에
한 송이 이름 없는 작은 꽃으로 피어나리라
혹여, 그대가 한 번쯤
하찮은 실수로
바람처럼 내 곁을 머뭇거리다
지나칠 때
고갤 꺾고 꽃잎 한 장 바람결에 날려 보리라
9. 먼길
한 사날-
진달래꽃 길을 따라 혼자 걸어서
그대 사는 먼먼 길 외딴 그 오두막 찾아가 보고 싶네
폭설처럼 꽃 지는 저녁
길 위에 엎어져 영영 잠들어도 좋겠네
꽃신 한 켤레
허리춤에 달랑 차고
10. 불두화 피는 밤
워낭 소리 무심히
빈 뜰을
채우는 밤
몽실몽실
달 아래
불두화 벙그는 소리
외양간 소가
귀 열고
가만-
눈 감으시다
11. 망종 무렵
할아버지 소와 함께 비탈밭을
가신다
송아지는 심심하다고
어미 그림자 졸졸 따라다닌다
개옻나무 아래 잠시
할아버지 눈 붙이시는 동안
커다란 두 눈 슴벅이며
어미는 연하여 송아지 목덜미를 핥아 준다
초아흐레 흐린 낮달이
가새뽕나무에 걸리는 한나절,
쑥꾹새 울음 따라
빨간 오디가 먹빛으로 익는다
12. 귀가
인제는 가리, 은하강 푸른 물결
하얀 쪽배 타고
청보리밭 사잇길 우마차 타고
필릴리- 필릴리-
하루 반나절 들어가면
우물가에 흰 닭이 울고
저녁연기 하늘로 긴 머리 풀어 올리는
탱자꽃 달밤에 화안한 그 집,
흰 무명 저고리 어머니가
아랫목에 더운밥 묻어 놓고
밤마다 젖은 눈 깜박이는 곳으로
# 원제목은 ‘귀향’이었음
13. 응봉국민학교
팔봉산 해 높이를 재며 시작되던
응봉국민학교,
무논에서 개구리가 라랴러려- 언문으로 울면
귀밑때기 새파란 아이들
입이 째지게 책 읽는 소리 들렸었지
측백나무 울타리 늦은 잠에서 깨어난 참새들
구구단 못 외워 벌 받는 아이처럼
살금살금 교실 안을 넘겨다보고
노오란 해가 눈썹 끝에 와서 걸리면
숙직실 부엌에서 강냉이죽 끓는 냄새가 솔솔
풍금 소리에 묻어오기도 했었지
운동장을 끼고 흐르는 실개천엔
각시붕어, 모래무지, 꾸구리, 미꾸라지가
파들거리며 손안에 들어와 잡혀주고
봄비 오다 갠 날 운동장 늙은 벚나무에선
팝콘처럼 터지던 벚꽃,
전교생이 소낙비를 가려도 넉넉하던
플라타너스,
코스모스 화안한 신작로 길, 가을 운동회,
꼴찌를 놓친 적 없던 백미 달리기는
여학생들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작게 했던가
담임선생님 등에 업혀 소풍 가던 상국이,
국어책을 잘 읽던 똑똑한 윤수,
눈물이 많아 울보 별명을 붙이고 살던 착한 완수,
무릎 꿇고 벌 받던 개구쟁이 용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졸업생 답사를 읽어나가던
빨간 스웨터 혜진이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던가
구렛나루 거뭇하던 영묵이, 덕회,
그리고 먹석골, 솔안말, 우체국, 청심당 약방도
지금 모두 잘 있는가, 잘들 있는가
# 충남 예산군 소재한 응봉초등학교의 옛 교명
14. 목
산다는 것은
목을 내놓는 일이다
목을 씻고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다
저녁에 돌아오며
목을 만져보는 일이다
15.밥과 법
밥이 있다
법이 있다
밥이 있고
법이 있는가
법이 있고
밥이 있는가
밥 속에
법이 있는가
법 속에
밥이 있는가
밥이 법을 먹으면
콩밥이 된다
법이 밥을 먹으면
합법이 된다
밥이 법이다
법이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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